일본 팔콤사의 궤적 10주년 기념작, <영웅전설 섬의 궤적 2>를 클리어. 플레이시간 67시간. 약간 서둘러서 했고 한글판이라 이전 궤적보다 진행에 시간이 덜 걸려서인지 플레이타임이 줄었다. 물론, 볼륨이 부실한 감도 있다. 후술하겠지만. 섬의 궤적이 희대의 클리프 행어로 끝나버려서 이번 작은 꽤 크게 주목을 받았었고 나도 크게 기대를 했는데.. 기대랑은 약간 어긋나버린 면이 있다. 후속작이니만큼 섬의 궤적의 내용은 스포일러로 간주하지 않고 쓰겠다.
그래픽과 모션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 비타판의 프레임 드랍도 예상했던 바이고, 일렁이는 이펙트가 들어가지 않은 부분에서의 프레임 유지는 오히려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 모션은 대체로 좋아졌지만 뛰는 포즈는 여전히 좀 어색한 것 같고, 모델링은 나는 전작에서도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은 안 해서. 리샤의 모델링은 정말 훌륭하니까 필견. 그 옷이 야한 건 알았지만 3D캐에 입혀놓고 움직이니까 이런걸 입고 암살자를 한다는게 황당해지기까지 하네 그려. 연출도 전체적으로 개선되었고, 전작보다 나으니까 개인적으로는 만족한다. 하지만 폰트는 여전히 좀 작은 것 같다.
모션, 로딩같은 큰 이슈부터 A-보이스 중 상자 안열리는 소소한 불편한점까지 확실히 개선이 되서 전작의 피드백을 충실히 받고 개선에 노력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첫인상은 굉장히 좋았다. 환전율도 도로 올라왔는데, 이건 팔콤의 DLC 정책의 변화와 관계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전작에서는 도구도 DLC로 팔아보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로딩 이슈로 DLC 계획이 완전히 동결되어버렸고, 이번 작에서는 복장 DLC만 내고 있다. 덕택에 돈은 많이 들어오는데 이번 작은 또 그만큼 돈이 많이 들어가서 전체적으로는 어떨지. 일단 나같은 경우에는 1회차 마지막에 장비 쿼츠 다 파니까 100만 미라 트로피를 딸 수 있을 정도는 되더라. 전작에서는 불가능했다.
새로운 전투 시스템은 오버라이즈와 기신전의 변화를 들 수 있겠다. 오버라이즈는 턴을 당겨오고+제로아츠 효과를 준다는 점에서 아오의 버스트가 떠오르는데 보다 전략적으로 사용하기는 이쪽이 더 좋은 것 같다. 두개를 장전할 수 있으니까. 나같은 경우에는 큐리아를 버스트(링크 5포인트의)와 오버라이즈에 많이 의존해서 굉장히 편리했다. 이번 작은 적 데미지 하나하나가 매우 아프고 상태, 능력치 이상도 매섭게 들어오므로 오버라이즈는 매우 편리한 시스템이었다.
전작에서 레벨과 운만이 좌우하던 기신전은 정식 시스템이 된 만큼 개선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EX아츠 덕에 버프 컨트롤을 해볼만해졌다는 게 좋은 개선. 하지만 궤적 전투 시스템의 재미는 턴을 밀고 당기면서 나오는 수싸움인데 이쪽은 여전히 없어서.. 괜찮아 다음작부터는 기신전 안 나올 테니까. ..안나오겠지?
하지만 전작의 문제였던 플레이어블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참전인원은 플레이어블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플레이어블은 많고, 쿼츠, 장비는 부족하고, 참가 인원은 겨우 4명인데 그나마 한자리는 주인공 대접 해줘야 하니 아무래도 아쉽다. 그만큼 밀도가 차 있는 캐릭터들도 아니라는게 더 큰 문제다. 몇 명은 팬서비스라고 넘어가 줄 수 도 있겠지만.
전투는 적이 회복을 하기 때문에 아군도 화력으로 밀어버려야 할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S크래프트나 고위 아츠 등 한방 한방이 무거운 공격의 비중이 보다 높아졌다.
음악은 OST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메인 전투테마는 초반의 키보드가 너무 싸구려틱하게 느껴졌고 Don't defeated by friend SAV를 지겹도록 쓴 건 대실망이었다. 하지만 결사전 테마는 Fateful confrontation의 향기가 매우 짙게 풍기는 멋진 신곡이어서 좋았고 Blue Destination도 좋았고.. 뭐 작품 하나에서 취향 맞는 곡 서너개만 건져도 난 만족해.
번역은 좀 왔다갔다 해서 검수가 잘 안됬다는 인상을 받았다. 심각한 오역은 없었던 것 같은데 고유명사 통일이 좀. 그 예로 전작에서 뻔히 푸른 불꽃의 태도라 했던 걸 아무일도 없었다는 양 창염의 태도로 써버린 점.
뭐 이런 식의 기본기는 팔콤 게임이라면 그래픽 논외로 하면 대체로 준수하게 갖추는 부분이었고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은 스토리니까, 그 쪽이 문제로 주로 언급해야 할 부분이겠다. 그리고 내가 섬의 궤적 2에 좋은 평가를 주지 못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는데, 무엇보다도 게임의 진행이 너무 늘어진다는 것.
궤적의 진행, 내지는 JRPG의 진행이라는 것은 결국 필드-마을(이벤트)-던전-보스의 연속이다. 마을의 이벤트로 던전, 그리고
보스를 잡을 이유를 부여한다. 그런 식인데, 이번 작은 필드, 던전이 너무 길다. 예를 들어보자. 1부에서 플레이어는 켈딕에서
갈레리아 요새로 향한다. 굉-장히 멀다. 맵 6장을 돌파해야 하니까. 심지어 섬2에서 추가된 필드는 하나같이 넓다. 직선 길이로만
따지면 노르드급일걸? 물론 그 와중에 AP를 위해서는 히든 던전인 정령굴도 돌파해야 한다. 여기도 맵 2장은 된다. 거기에
보스전도 있지. 역대 어느 궤적이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시켰는지 모르겠다. 진행하다가 질릴 정도였다. 내 플레이 방법은 필드의
상자를 털고 동선에서 마주치는 마수를 잡으면서 진행이라 특별히 노가다를 더 하진 않는데도 진행이 괴로웠을 정도.
거기에 던전을 돌 것을 강요하면서도 그게 걸맞는 이벤트를 별로 풀어주지 않는다. 내가 감히 역대 궤적 역사상 최악의 진행으로 꼽게 된 2부 후반의 칼만들기를 보자. 제무리아 스톤 4개를 모아야 한단다. 좋아, 그럴 수 있어. 던전 4개를 뚫는다. 그런데 보스가 그냥 마수다. 던전 뚫고 보스 잡고 제무리아 스톤 얻기 *3. 4번째에야 겨우 비타님이 나오신다. ...굳이 4개를 돌게 만들 필요가 있었나? 나는 발리마르의 뭔가 숨겨진 기능을 개방한다거나 그런 식의 떡밥을 붙일 줄 알았다. 이건 너무 안이하다.
한편 외전의 지오프론트를 보자. 외전은 정말로 심플하다. 까놓고 말해서 외전에서 중요한건 린과 로이드의 대립구조를 보여준 이벤트전 뿐이다. 그런데 거기까지의 던전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정말 크고 복잡하다. 거기에 후일담의 '무의미' 던전을 보면, 팬서비스라는 건지 대놓고 18층이라는 거대 던전을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그 던전의 가치란게 정말로 무의미했던 것이라..무의미 자체야 의도라고 해도 층수는 좀 줄여주거나 스킵을 넣어주거나 아오 귀찮아 다깼는데 막판에 18층 던전은 너무하잖아?
나는 이것이 볼륨 강박증에 있지 않느냐 하는 의심을 한다. 팔콤의 세일즈 포인트 중 하나는 그 무식한 볼륨에 있었다. 다만, 볼륨을 늘리면서 유저를 즐겁게 해 줬는지는 별개다. 이번작은 정말 SC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진행에 떡밥을 전혀 풀지 않아서, 이런 저런 수단이 없었다면 플레이타임은 40시간대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빈약한 볼륨을 던전으로 가린게 아니냐? 하는 의심이다.
한마디로 진행이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질릴 정도로 긴 던전만 이어지는 반면, 메인 이벤트는 그리 흥미롭지 못했기 때문에. 서장에서의 유미르 습격, 막간의 판타그뤼엘 탈출, 2부의 안젤리카와의 만남, 종장 크로우전 이후.. 정도가 좀 불타올랐지 그 외에는 계속 뜨뜻미지근해서 문제. 기껏 멋진 보스들을 냈으면 좀 전면에서 굴렸어야 하는데 당연히 2부에서 만날 줄 알았던 놈들이 코빼기도 안보이니.... 그리고 V나 S전은 기신전으로 슬쩍 넘겨버렸던 것도 문제. 궤적 하면 역시 넴드와의 처절한 전투가 재미 아닌가?
플레이어블이 많아진 반면 캐릭터 개개의 인상은 더욱 희미해졌다. 메인 이벤트에서 직접적으로 다뤄진 캐릭터는 유시스, 엠마 정도다. 나머지는 인연이니 사이드 이벤트니로 빠졌는데, 인연 이벤트의 경우는 1회 플레이에서 다 볼 수가 없고, 사이드 이벤트도 정말 열심히 챙기지 않는 한 다 보는건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캐릭터에 대한 묘사를 평범한 플레이어는 플레이하면서 보기 어렵다. 애초에 캐릭터가 너무 많았다. 7조의 인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캐릭터는 엠마, 유시스, 마키아스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엽병 대표로 피를 살리고, 히로인 역으로 알리사나 라우라를 합쳐서 내놓으면 딱 6명. 이정도면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스토리 면에서는.. 가장 크게 비판을 받는 부분인데 나는 곱씹어보니까 외려 주제 의식이 괜찮지 않았나 생각한다. 린과 7반의 행동은 한마디로 자기모순 덩어리다. 제 3의 물결 운운하면서 혁신파에 철저하게 협력하고, 아이언 브리드들에게 놀아났다. 이것이 모순이라는 걸 플레이어도 알고 팔콤도 알고 그리고 린도 알았다. 때문에 이 전개가 모순적이라고 깔 수 없다. 그런 모순을 저지른 것을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17세의 소년 소녀들이 으쌰으쌰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자신의 의지로 휘둘렀다고 생각했던 그 힘의 방향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그들 자신이 장기말이었다. 린은 종장의 끝에서 그것을 여실하게 깨닫는다. 크로우의 인생은 무의미했다. 크로우가 심판의 철퇴를 내리기 위해 했던 모든 것, 심지어 그 자신이 이뤄낸 최고의 성과조차 기만이었다. 크로우 또한 더 큰 벽에 가로막혀 있었던 것이다. 크로우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죽은것은 그 자신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로우의 삶의 무게마져 넘겨받은 린에 있어서는, 자신이 장기말이었다는 것, 크로우의 노력이 무의미했다는 것마저 짊어져야 했다. 거기에 분노를 쏟아내야 마땅했을 증오의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라니? 그야말로, '절망마져도 빼앗긴' 최악의 엔딩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가야 한다. 그저 한결같이, 앞으로.
의지와 희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휘두르기만 해서는 불가능하다. 한 사람의 영웅이 대륙을 구원하던 시기는 끝났다. 영웅전설이란 타이틀을 가진 이 게임이, 가장 학원물 청춘이 빛나던 섬의 궤적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소년물의 영웅을 부정해버렸다. 나는 다음 궤적이 영웅전설이란 타이틀을 떼버려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약간 개연성을 뒤틀어서 무난한 승리의 역사를 쌓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팔콤은 굳이 화두를 던졌다. 시대의 끝을 선언했다. 하지만 궤적은 끝나지 않았다. 팔콤은 그 대답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 이번 작이 맘에 안 들었다고 팔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다만 말이지....... 이건 섬의 궤적 SC라는 걸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지금까지 팔콤의 SC는 해답편이었다. 하지만 섬의 궤적은 1, 2가 모두 해답편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섬의 궤적 2는 팔콤의 SC다운 마무리를 기대한 팬들의 기대를 여실히 배반했다고 할 수 있다. 재상이 부활하고 내전에 혁신파가 이긴다는 것은 이미 스포일된 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면에서의 비판은 팔콤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10년을 계속 쫓아온 팬들이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다음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의 퀄리티를 위해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겠지만, 시리즈 전체의 인기 유지에는 썩 도움이 되지 못할 건 분명하다.
어쩌면 팔콤은 린에 대한 대답을 이미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외전에서 등장한 로이드가 바로 그 대답이다. 로이드도 경찰의 한계, 크로스벨의 한계 속에 계속해서 벽을 맞이한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결국 벽을 넘어선다. 온실속의 화초처럼 7반에서 주변의 보호를 받고 있던 린은 이제 겨우 냉엄한 현실이란 하나의 벽을 맞았다. 외전에서 로이드와 린이 대립한 것은 양자의 입장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린은 이제 겨우 18살이다. 크로스벨 독립을 위한 공백의 2년은, 곧 린의 성장기로 채워질 것이다. 로이드와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그렇게 생각할 때, 섬의 궤적은 제로/아오보다 먼저 나왔어야 했던 것이 아니냐 싶기도 하다. 섬에서 린의 절망과 의문을 보이고, 제로/아오에서 로이드의 벽을 넘어서는 근성으로 대답한다는 것. 하지만 순서는 뒤집혔고, 로이드가 린에게 대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한 작품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까지 뭐라 할 수는 없겠지.
작은 투정 하나를 부리자면 이번작 끝으로 기신을 다 뽀개버리길 바랬던 나의 작은 바램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미 양산형까지 나온 마당에 기신전이 짤릴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잘라라 좀.
결론적으로, 섬의 궤적 2는 섬의 궤적을 마무리하는 작품이었고, 그 메세지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궤적의 SC로써는 여러모로 함량 미달이었다. 팔콤이 애초에 궤적의 SC로써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냐 싶을 정도로. 때문에 나는 섬1,2가 결합해서 하나의 작품이었다면 FC로써 역대 최고라는 평을 주저않고 내리겠다. 하지만 팔콤이 섬을 분할했고 내가 받은 것이 섬1과 섬2라는 쪼개진 조각인 이상, 섬1, 섬2 모두 그리 좋은 평을 줄 수가 없다. 지금 섬2가 안고 있는 늘어지는 게임플레이상의 문제가 정말로 분량 조절의 문제라 한다면, 팔콤의 섬 분할은 최악의 결과를 낳은 셈이다.
하지만 이번 작을 통해 처음으로 단순히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데? 가 아니라, 팔콤이 이 궤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관심이 생겼다. 때문에 나는 여전히 팔콤팬으로 남을 것이고, 다음 작을 기대할 것이다. 팔콤이 섬에서 던진 화두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