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가 아닌 문화물

<요리코를 위해>, <1의 비극>

ins12 2016. 6. 5. 22:01

 요즘은 마실 나갈때마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려서 추리소설을 몇 권씩 사오는게 취미가 되었다. 와서 읽고 모아서 다시 판다. 사실상 대여하는 셈이니 도서관에서 해야 할 일을 여기서 하는 셈인데, 이 동네가 도서관 접근성이 아주 끔찍한데다 한 권을 2주일만에 읽을 자신이 없어져서 그냥 중고로 구매하는 편. 사실 파는 돈은 거의 푼돈이지만 집에 둘 자리도 마땅찮고 내 방에서 책이 죽는 것 보다는 중고서점에서라도 돌리는게 더 낫지 않겠나 싶기도 한다. 뭐,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라면 신간을 사서 중고로 돌리는게 맞겠지만.

 그간 읽던 요코미조, 아야츠지, 아리스가와 등은 국내 소개된 책들은 대부분 읽고 해서 이름만 들어봤던 작가들로 확장해가고 있다. 노리즈키 린타로도 신본격 작가군에서 빠지지 않는 이름이니만큼 <요리코를 위해>를 보고 바로 구매. 다 읽고 마음에 들어서 <1의 비극>도 읽었다. 근데 말이지, 다 읽고 나니까 왜 이 작가가 신본격으로 분류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던 신본격이란 철두철미한 트릭싸움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의 트릭을 마술처럼 탐정이 풀어내는 지극히 원형적인 추리 소설의 형태였다. 그렇기에 시마다 소지, 아야츠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신본격의 작가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들의 소설은 사건의 귀착에 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물론, 시마다 소지는 사회파 작품을 여럿 써냈고, 아야츠지 유키토는 호러 서스펜스를 여럿 써냈으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청춘소설을 써내기도 했지만.)

 하지만 노리즈키 린타로의 본 두 작은 확연히 다르다. 트릭이 없진 않고 놀랍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사건의 후던잇, 하우던잇보다는 사건에 의해 영향받는 인물을 쫓고 있다는 인상이다. <요리코를 위해>는 유지와 요리코를, <1의 비극>은 야마쿠라를. 결말은 상류층 가정에 내포되어 있던 갈등이 파멸로 귀결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 파멸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지극히 봉건적인 구조적 억압에 의한 것과는 달리, 순수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의 문제. <요리코를 위해>의 작가 후기에서 쓰인 대로, 하드보일드라 느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이용해 주제의식을 표출한 사회파에 반기를 들었던 초기 신본격 작가의 일원이 써낸 작품이 내가 생각했던 신본격이 아니라는 건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점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본격에 물린 사람들이 하드보일드와 스릴러를 만들어냈듯, 내 독서 취향 또한 신본격의 트릭 싸움에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